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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의 획득

예술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예술의 근본적인 목적에서 바라보아야 옳지 않을까 싶다. 상업과 결부되어 변질된 형태의 '디자인 마케팅'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예술은 아직 계몽적이다.

예술 뿐 아니라 모든 문화가 사람을 만들어 내고 인격을 형성하는데에 있어서 또 사회를 구성하는데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멀리 볼것이 아니라 현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중문화라는 일부분의 형태만을 바라보더라도 그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예술은 아직 계몽적이다. 라는 말은 어쩌면 희망적인 말일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변질된 형태의 상업예술과는 별도로 근현대의 순수미술 조차도 계속적인 탈바꿈을 통해 점차 계몽이라는 예술의 상징적인 자태를 잃어가고 있다.
(혹은, 상업예술에 휘말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쉽게 인지되던 미술의 형태는 대부분이 알다시피 현재에 와서 극도로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술은 사실상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역량을 표현하기 위한 무한의 자유는 미술의 신기원을 이끌어 내었다.
사물을 알아볼 수 없는 부정형적인 형태에서 부터 흩뿌려지는 물감과 전신을 사용해 찍어내는 그림들..
 예술이 물론 작가의 언어를 풀어낸 것이라는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 여지가 없다. 또한 현대 예술이 그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를 담아내기 위해 이런식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 또한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언어란 소통을 위한 것임에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의 예술이 소수의 대화가능한 사람들을 선별해 내고 그들만에게 작품을 한정 짓는 것은 예술 스스로가 무덤을 파는일이다.
실제 언어를 예로 들어 보면, 서로간의 언어가 이해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려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떠한 방향으로든 고하가 결정이 되어져있다면 아마도 필요 욕구가 강한쪽이 약한쪽의 언어를 배우려 하는 구도가 형성이 될것이다. 예술로 돌아가보자. 작가는 읊조리고 대중들이 그 작가의 언어를 배우려고 한다? 마치 작가는 대중과의 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대중들이 그것을 바라는 상황이 되어버리진 않은것일까?

예술의 이러한 무책임한 발전은 다시 예술에게 오만함이라는 독단을 안겨주었다. 혹여라도 어느날 대중들이 이 독단을 터뜨리게 된다면 예술은 더이상 존속하기 힘들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