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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큐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 - 작별

어느 날 닥쳐온 불행한 사고, 하늘 아래 단둘이 남은 자매,
그들에게 또 한 번,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사고 로 부모와 막내동생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엄청난 비극을 겪은 자매, 메메와 아네따. 사랑하던 가족을 떠나보낸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두려움을 떨쳐낸다.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달래주고 속마음을 알아맞히는 놀이로 비밀을 나누고, 가끔은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이렇게 언제나 좋은 짝을 이뤄온 두 사람 사이에도 작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언니 메메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 메메는 사고로 뒤틀린 운명에 좌절하고 사랑 때문에 상처받을 때마다 술과 담배에 매달려 슬픔을 달랬기에, 이런 이별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네따의 탄식처럼, 작별은 늘 생각보다 조금 일찍 온다.
 “왜 하필 지금이야? 우린 너무 행복했는데...”

 조금 미리 알았다고 해서 준비할 수도 없으며, 한 번 겪어 보았다고 해서 면역이 생기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다. 사랑을 잃는 마음은 늘 처음처럼 아프기만 하고 남겨진 사람은 상실감으로 한동안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쓸쓸함을 겪는다.

 <러브레터>의 독서카드처럼 <시네마천국>의 NG 필름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단숨에 되돌려주는 언니의 선물, 빛바랜 앨범


 메메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언젠가 감춰뒀던 가족 앨범을 아네따에게 남겨준다. 이제 아네따가 홀로 견뎌야할 슬픔의 시간을 헤아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늘 함께 할 거라고 동생을 위로하듯이...


 사진 속에는 아네따가 구구단부터 어른들의 세상살이까지를 어렵게 배우는 동안,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이 기억 속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사고가 닥치기 전, 자상하고 다정하던 부모님, 귀여운 막내, 메메가 안경잡이 괴물이라고 놀려대던 아네따의 꼬맹이 적 모습, 다리를 절지도 않고 술과 담배도 모르는 티없이 밝은 메메가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웃음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메메는 이 앨범과 편지를 통해 이 세상에 혼자 남을 동생에게 ‘슬퍼말아라. 꼬맹아, 스쳐지나간 작은 기억들이 네 마음속에서 보석처럼 빛날 거야. 훌쩍 떠나버리는 게 아니야’라고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메메는 남아있던 가족사진에 자비엘과 아네따의 달콤한 키스 장면들을 덧붙여 아네따가 잃었다고 생각했던 사랑을 돌이켜준다. <러브레터>의 독서카드처럼 <시네마천국>의 NG 필름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단숨에 되돌려주는 사진들. 아네따가 빛바랜 앨범에서 첫 키스의 떨림과 마주칠 때, 어느새 우리는 편지와 앨범을 선물 받은 그녀의 자리에서 언니 메메의 마음을 느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메메는 자신의 빈자리를 그동안 함께 나눴던 추억으로, 전보다 더욱 애틋한 사랑으로 채워주려고 했고 아네따는 여기서 언니의 따뜻한 마음을 뒤늦게 발견하는 것이다.


사랑이 떠나간 자리, 파도처럼 밀려드는 작은 기억들

 어딜 가든 가족앨범을 끼고 다니며 같은 사진을 보고 또 보던 어린 아네따와 “다 죽은 사람들”이라며 동생을 야단치던 메메. 두 사람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방법이 각각 달랐던 것. 아네따는 알지 못했지만 메메는 추억과 마주보는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에게 전과 꼭 같이 남아 있는 사진들이 더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것,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한 얼굴을 다시는 만나 볼 수도 행복하던 그 때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게 안타까움만 더한다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들이 낡을 줄 모르고 되살아나 가슴을 미어지게 하리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잃고 아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떠난 사랑의 자리에서 추억을 더듬어본 사람이라면, 메메가 두려워하던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느낌을 가슴 저리게 전하는 노래가 호안 마누엘 세랏(Joan Manuel Serrat)의 “내가 기억하는 작은 것들(Aquellas pequeñas cosas)“이다.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그 작은 기억들이 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이 곡은 영화 <작별>의 전체적인 정서와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마음 깊숙한 곳의 허전함까지 들춰내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들

 <작별>에서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제 3의 주인공.
음 악을 맡은 바비 로페즈 퍼스트는 마음을 울려오는 애잔한 연주곡부터 흥겨운 분위기의 노래까지 귀에 쏙 들어오는 곡들을 두루 선보이고 있다. 영화의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음악은 호안 마누엘 세랏(Joan Manuel Serrat)의 “내가 기억하는 작은 것들(Aquellas pequeñas cosas)".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떠나간 기차는 다시 돌아오죠.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건 언제나, 스쳐 지나간 작은 기억들.
 함께 걷던 골목길, 혹은 낡은 서랍 속 빛 바랜 종이 위에 남겨진 그 기억들은
 도둑처럼 문 뒤에 숨어있다가 살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와서는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날리듯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겠죠
 그러다가 문득, 그 기억들이 슬픈 미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면
 혼자 남은 우리는 눈물짓고 있겠죠. ----- “내가 기억하는 작은 것들”

 “내가 기억하는 작은 것들"은 시적인 가사와 함께 음미한다면 이 한 곡의 노래가 <작별>의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다. 세랏의 음성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그리움이 전해지며, 첫 소절부터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내내 마음 깊은 곳 그리움까지 메아리쳐서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아픈 노래!



 피아노 삼중주, 피아노 솔로, 기타 솔로로 조금씩 색깔을 달리하며 흐르는 메인테마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곡조로 자매의 삶과 사랑을 전한다. 특히 등대가 있는 바닷가 장면에서는 쓸쓸한 메메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듯한 현의 느낌이 인상적이다.

 사실 어느 한 곡 빼놓을 것 없이 음악과 춤을 사랑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데, 페레즈 프라도의 "맘보 No.5"가 그 중 하나. 앤디는 이 노래를 틀어놓고 아네따에게 춤을 청하고 관객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벽에 기대 앉아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다. 메메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묻어두고 괜찮은 척 애쓰는 앤디가 더욱 안쓰러워 보이게 마련이다.

 귀에 익은 노래로 또 하나, 소울 보사 트리오(Soul Bossa Trio)의 “Ain't no sunshine"이 메메의 결혼식 피로연에 등장한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에는 햇빛도 사라지고 말았다(Ain't no sunshine when she is gone)"는 가사는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돌로레스의 죽음이 메메에게 준 충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곧 이어 닥칠 메메와의 ‘작별’을 예고하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다.

 남쪽의 등대
 가장 소중한 추억의 공간, 사랑하는 이에게 빛을 전하는 마음

 <작별>의 원제는 <남쪽의 등대(El faro del sur)>.
 남쪽의 등대는 유부남과의 사랑, 뜻하지 않았던 유산으로 메메가 절망에 빠졌을 때, 앤디가 자매를 초대했던 곳이다. 앤디는 “천국을 만날 준비가 됐어?”라는 말과 함께 메메의 눈을 가렸던 손을 떼는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 밖으로 바다가 펼쳐지는 다음 장면은 진짜 천국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메메에게 등대가 있는 이 바다는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쓰라린 심정을 위로받은 곳이며 앤디에게서 또 한번 상처받는 곳, 그렇게 거듭된 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새로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 등대의 이미지와 바닷가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근사한 경치가 아니라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 된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그 등대 그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관객들이 가장 마지막에 보는 장면 역시 등대가 있는 바닷가에서 춤추는 자매의 모습이다.

 메메가 마지막 편지에서 아네따에게 고마움을 전할 때, '너는 나의 등대였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커다란 이별을 겪고 난 후, 등대처럼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는 메메와 아네따. “내가 더 사랑해, 내가 더, 더 많이...” 자신이 보내는 사랑이 더 크다고 고집부릴 만큼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두 사람. 이 자매를 묘사하는데 등대의 비유처럼 꼭 들어맞는 것도 없지 않을까



관객의 기억을 붙잡아둘,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

 작은 기억들이 더욱 그리움에 사무치게 한다고 말하는 영화 <작별>은 장면장면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어, 잊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가득한 작품이다. 자칫 진부하고 신파적으로 흐를 수 있는 고아 자매의 삶과 사랑이라는 내용은 아기자기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에 힘입어 실감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천사처럼 헌신적인가하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언니와 한없는 말썽꾸러기 같으면서도 언니보다 어른스럽기도 한 동생. 그들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는 마치 우리 곁의 형제 자매나 친구의 모습처럼 보인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서만 통할 것 같은 “상어노래”나 “고모 물병에 메메가 과연 실례를 했는가” 같은 사소한 얘깃거리까지 엿보게 된 관객은 그들을 한층 가깝게 느끼기 마련이다. 이런 작은 이야기들은 메메와 아네따가 싸우고 어색한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 때나, 진지한 대화 도중에 문득문득 끼어들면서 긴장을 확 풀고 슬픔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또, 이런 소재들이 세월을 두고 몇 번씩 되풀이 될 때는 오래 알고 지낸 듯한 친근함까지 더해진다.

 실제로 아네따의 상어노래가 웃기고 야한 노래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노래가 반복돼 온 시간 덕분이다. 열 여덟 아네따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선 가사에 담긴 성적인 농담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재미있는 노래로만 여기는 꼬마가 겹쳐져 떠오른다. 메메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등대 앞을 눈앞에 그리는 순간에는 아네따도 어린 시절 즐거웠던 한때로 돌아간 기분을 내며 이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은 이 장면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와 함께 몬트리올 영화제 관객상 수상

제 22회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관객들은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신 두 작품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웃음을 보내준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를 향해, 그리고 죽음을 예감하고 동생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남기고 떠난 <작별>의 메메를 향해... <작별>은 <인생은 아름다워>에 이어 관객 인기상 2위를 수상하며 이별의 아픔과 쓰라린 상실감을 실감나게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았으며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잉그리드 루비오는 발랄한 표정 아래 슬픔을 드러내는 인상적인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라틴아메리카의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화면

 <작별>에서는 이곳저곳을 떠도는 자매를 따라 가면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도 충분한 눈요깃감.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가족사진부터 포르투갈 리스본의 중앙역, 스페인 마드리드 중심가인 마요르 광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이들이 살아온 지역을 돌아보게 한다. 사고를 당하던 때, 가족들은 스페인에서 15년간 살다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사고 이후 메메와 아네따는 그들이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빌라 빅토리아’를 떠나 고모들이 살고 있는 우루과이의 ‘벨른’으로 옮겨간다. “이 빌어먹을 동네엔 다시 오지 않겠어!” 사고 현장인 빌라 빅토리아에 대한 메메의 반감은 나중에 아네따가 만나는 청년을 이곳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반대할 만큼 뿌리깊었다.
 영화 속에는 우루과이의 ‘콜로니아’와 ‘몬테비데오’, 등대가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산 이그나시오’의 풍경이 차례로 펼쳐지며 10년 후로 훌쩍 시간을 뛰어넘었을 때는 다시 아르헨티나! 자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하고 있다. 이처럼 <작별>은 가족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대사중심으로 이루어져 지루하다는 불평에서도 살짝 벗어난 작품이다.


언니랑 같이 보자! 돋보이는 가족 영화!

 <작은 아씨들>, <음식남녀>, <레인맨>, <흐르는 강물처럼>, <유 캔 카운트 온 미>, <천국의 아이들>...
 형제, 자매, 남매를 다룬 영화들 중에는 특정시대와 공간을 넘어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소홀해지기도 쉬운 사이,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쩐지 쑥쓰러워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이. 어쩌면 연인들보다 사랑도 질투도 강하고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관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작별>의 메메와 아네따 이야기도 자매 간의 사랑과 다툼이 따뜻하게 담겨 있다는 점만 놓고 보면 다른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별>에서는 갑작스런 사고로 단 둘이 남게 된 비극적인 상황, 9살이라는 나이 차에서 오는 갈등,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이어져 한 순간도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돋보인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역시 마지막 작별 이후의 시간. 투닥투닥하던 자매들끼리 보면 감상이 남다를 것이다. 가슴저린 노래가 흐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살짝 눈물지을 때 소중한 이와 함께라면 그 사람의 손을 꼭 잡아주자.


수상경력

몬트리올 영화제 여우주연상, 관객상
아르헨티나 영화 비평가협회 감독상,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고야상 (스페인의 아카데미상) 최우수 영화상 (Best Spanish Language Foreign Langu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