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avorite/Movie

봉준호 감독과 설국열차의 세계


봉준호 감독과 그의 영화

 봉준호 감독의 영화관은 흔히들 좌파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가 현실의 상황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충돌 및 사회적 갈등을 담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내뱉는 시대적 배경과 괴물의 탄생 비화가 그러하듯 봉준호의 영화는, 열려있지만 닫혀있는 그 만의 언어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최신작
'설국열차'는 그러한 봉준호의 문제의식 담기의 끝판 왕인 것처럼 보인다.


설국열차 Special Animation


 영화의 배경은 201X년, 지구 온난화 해결을 위해 대기 중에 CW-7 이라는 화학 물질을 터뜨리기 시작하면서 빙하기가 닥쳐오고,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차에 생존자들이 탑승하게 된 17년 후의 폐쇄된 열차 사회. 제일 앞인 엔진 칸의 열차 제작자 윌포드가 탑승하고 꼬리 칸에는 가진 것 없는 일반인이 탑승한다. 꼬리 칸에서부터 엔진 칸까지 나누어진 열차를 통해 우리는 누구라도 쉽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자산의 유무에 의해 구분된 암묵적 현대사회의 계급제도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또' 한번 그가 지금까지 말해왔던 '그' 주제의식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그것도 과거에 보여줬던 은근함을 떠나 적나라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충실히 담아내지는 못했다.. 헐리우드 첫 진출작이라는 부담 때문이었을 수도 아니면 방대한 세계관을 다루기엔 봉준호의 능력이 너무 부족해서였을수도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건간에 영화는 영화 본연의 내용도 그의 주제의식도 담지 못한 채 처음과 마지막 30분을 제외하고선 궤도를 벗어나 표류한다.

좋은 내용, 나쁜 포장.

 갑작스러운 질문이겠지만, 잘 된 포장이란 어떤 포장일까? 튼튼하기도 해야겠고, 선물이라면 주는 사람의 마음도 담을 수 있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풀어보는 재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내용물이 비치는 포장은 재미가 없다. 또 포장이 지나치면 포장지를 풀다가 흥이 식어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일종의 포장된 선물이다. 보일 듯 말 듯한 감독의 의도를 찾아 관객들은  두 시간여에 걸쳐 포장을 풀어 나간다. 기승전결이 아니라도 좋다. 하지만 두 시간여에 걸친 그 긴장감을 달성할 수 없다면, 혹은 영화가 끝나고도 긴장감만 남아있다면 막말로 그 영화는 포장이 잘못된, 망작이라 생각한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 정말 두텁고 화려한 포장을 시도한다. 영화 밖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제작비, 첫 헐리우드 지출작이라는 위명, 그리고 깜짝 놀랄만한 연출을 이루어 냈고 영화 안에서는 논리적인 배경, 개연성 있는 상황, 개성 강한 캐릭터까지. 재료 하나 하나가 어디서 구하기도 힘든 고급 재료들이다. 하지만 이런 훌륭한 포장재료에도 불구하고 이 포장은 망했다. 그것도 쫄딱.


세 가지 실수

 영화의 시작은 사뭇 장엄하다. 디테일 하게 묘사된 비참한 꼬리 칸의 생활과 분노에 찬 사람들의 모습. 우리는 이를 통해 앞으로의 전개 과정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체제의 전복. 분노의 표출. 앞으로 나아가면서 피의 학살을 자행하는 액션 영화든, 아니면 유산계급을 설득하며 벌이는 유산자와 무산자 간의 치밀한 심리 싸움이든, 그것도 아니면 주인공 커티스가 기적을 만들며 싸워나가는 휴먼 드라마든... 그리고 결과가 어떠하든 이 싸움은 치열하고 눈물겨우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스토리에 반전은 없었다.
 아니, 반전은 있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주인공의 행보는 치열하지 않다. 아니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하다. 처음 우리가 엿보았던 앞쪽 칸 사람들에 대한 처절함과 복수심은 시간이 지날 수 록 윌포드 한 명에게 집중되어 간다. 아니, 집중되어 진다기보다는 그냥 떠넘겨진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여기서 봉준호의 첫 번째 실수가 드러난다.
 영화 내내 분노에 찬 커티스의 대사와는 무관하게 그의 행동은 차분하기만 하다. 아주 잠시, 영화 초반 물 공급 칸 앞에서의 싸움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우리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엔 영 시원치 않다. 봉준호 감독은 아마 몇 번의 칼부림과 잔인한 영상만으로도 사람들의 공분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가 성공했다면 봉준호 감독은 아마 '13일의 금요일'이나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같은 영화 조차도 앞으로는 충분히 A급 영화로 만들어내는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감독은 그러한스토리 텔링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그곳에서의 칼부림은 불필요하게 잔인했으며 그렇다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안에 담긴 가끔의 유머코드는 심지어 그러한 의미를 퇴색시키기 까지 한다. 블랙코미디도, 그렇다고 진지한 느와르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 장면이 지나고 우리에게 남은 건 분노도 절망도 아닌 그저 이유 없는 잔인함에 의한 찝찝함과 허무함 뿐이다. 이후의 내용 전개는 이러한 허무함의 정점을 찍는다. 꼬리 칸의 지도자 길리엄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한다. 무산자의 분노와 계급 간의 충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과 몇 분 만에 영화는 개인적인 사연을 지닌 커티스와 자식을 잃은 두 부모 그리고 크로놀 중독자 두 사람의 이야기로 압축되어버린다.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봉준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스템에 관련된 이야기 아니었던가? 왜 굳이 계층 간의 갈등이라는 더 쉽고 좋은 구조를 떠나 그걸 개인과 개인의 대립으로 바꾸어 버리는지 모르겠다. 물론, 가능은 하다. 상징적인 사람을 통한 대립 구도야 얼마든지 있어왔으니까. 하지만 이처럼 단체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다시 상징을 통한 대립구도를 재제시 하는 이유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그래. 좋다. 개인의 대립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거라 치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봉준호의 두 번째 실수는 바로 그 다음칸부터 다시금 반복된다.
 물 공급 칸을 지나게 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꼬리 칸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 길리엄을 중심으로하는 한 쪽은 잔류를, 커티스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그룹은 전진을 택한다. 여기서 그들은 목표를 잃었다. 그들에겐 꼬리 칸을 떠나오면서 가졌던 목표의식이 없다. 잔류 그룹 뿐 아니라 전진 그룹 조차도 자신의 아이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표와 크로놀이 예전의 목표를 대신하고 있다. 유일하게 커티스만이 앞으로 나아가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처음의 목표를 이어가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화는 이제 우리가 생각했던 시스템간의 투쟁이 아니라 커티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물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영웅이 된 커티스는 자비로워진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처음의 다짐은 어디로 가고 열차 유람을 즐긴다. 수족관 칸에 가서 스시도 먹어주고, 유치원에 가서 애들과 선생의 유치찬란한 쇼를 보며 어이없어하기도 한다. 머리하는 아줌마들을 스쳐지나가며 눈 한번 흘겨주고 클럽도 들어갔다 나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커티스의 분노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눈치 챘겠지만 위에서 나온 수족관과 스시, 미장원과 유치원의 쇼는 당연히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장치들이다. 하지만 커티스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묵묵히 윌포드를 향해 전진한다.
 마치 지금 자본주의의 실패는 모두다 박근혜 정부 탓이예요. 기업들이요? 걔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시키는 대로 한건데? 같은 x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현실의 반영? 계급간의 충돌? 어딜봐서 이 영화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는 걸까? 그런 내용을 담고 있긴 한걸까?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이런 중반의 지지부진함을 다시 또 5분만에 잊어버리고선 영화 후반부를 통해 확실히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을 위해 봉준호 감독은 과감하게 세 번째 실수를 자행한다.
 커 티스의 여정은 그래도 아주 쉽지는 않다. 그래도 영웅에겐 고난은 필요한 법이니까. 총싸움도 한번 해주고, 근성 있는 악역 탓에 사우나도 제대로 한번 해주신다. 그리고 그 억지 고난을 넘어 커티스는 엔진 칸의 문 앞에 도달한다. 어? 근데 이게 뭐야. 주인공은 커티스가 아니었나 보다. 크로놀 중독자인 줄만 알았던 남궁민수가 주인공을 쫓아내고 꽤나 멋있는 이야기를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정작 주인공이라 하는 커티스는 윌포드를 만나고 나더니 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는 지금까지 비록 방향은 잃었음에도 전진하고 있었다. 작지만 각자가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과 목표에 충실했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기 위해, 잃어버린 영화의 방향을 되찾기 위해 인물들의 개성을 급작스레 뒤섞어 버렸다. 비록 윌포드의 달콤한 유혹이 부분적으로 이를 합리화 해주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영화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멈추어졌고 다시 정상 궤도를 찾을 수가 있었다. 아니, 탈선한 열차가 자연스럽게 궤도로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듯이. 그래, 영화는 망함으로 가는 선로를 타버렸다. 그리고 영화는 부서진다.
 남궁민수의 역할은 지대하다. 영화 30분을 남기고 지금까지 틀어져 왔던 감독의 모든 실수를 바로 잡을 뿐 아니라 감독의 화신이 되어 봉준호가 하고 싶어하는 그 얘기를 적나라하게 쏟아낸다. 뜬금없고 당혹스럽지만 남궁민수의 진리에 의해 기차는 열려야만 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아직 할말은 남았다. 위에서 설명하지 못한 봉준호 감독의 실수에 대해서.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봉준호 감독은 하나의 실수를 더 저질렀다. 거름이 되어버린 수많은 떡밥들이 그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 중반부의 큰 흐름에서 감독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감독은 영화 내내 본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떡밥들을 수없이 던져왔다. 길리엄의 존재, 커티스의 과거, 남궁민수의 과거, 크로놀의 존재, 요나의 비밀, 윌포드의 사연, 길리엄과 윌포드의 관계, 열차의 탄생....
 하지만 잘못 잡힌 영화의 흐름에 떠밀려 그 떡밥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채 그냥 흘러가버렸다. 무의미한 떡밥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는 좋은 소재들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에 그나마 살을 덧붙이고 가지를 쳐주는 역할을 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열심히 뿌린 씨가 싹을 틔우질 못하니 꽃을 피워야 했던 그 수많은 소재들은 썪어버렸고 이리 저리 얽혀 수많은 오류와 의문 만을 남기게 되었다.

엄청나게 아쉬운 평범한 SF

 이제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영화 재밌나?  어 렵게 이야기 하자면 봉준호가 가진 포장재료는 훌륭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 처음 만난 훌륭한 재료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결국, 포장은 과장되고 물이 새고 구멍이 나고 말았고, 그가 포장하고자 했던 내용물은 포장을 채 뜯기도 전에 들통 나고 상처받았으며 마침내 더러워지고야 말았다. 봉준호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영화는 그냥 SF가 되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을 여유롭게 갖고 좀 쉽게 얘기 한다면? 설국열차는 언론에서 떠들어 댄 것 만큼, 그리고 개봉 이틀 만에 관람 인원이 100만 명을 넘어갈 만큼 명작은 아니다. 하지만 워낙 재료가 좋은 탓에 이 영화를 그냥 SF로만 봐 준다면 생각보다 잘 만든 작품이다. 그래도 400억이 넘게 들어간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그래픽과 배우는 담고 있으며, 정말 암울한 미래를 연상시키는 기계적 & 자연 환경과 소품들 그리고 비디오(유치원 교육 영상?)는 한국 영화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높은 수준의 디테일을 담고 있었다. 배우들은 이 정도의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각각에게 주어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무리 없이 보여주고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도 세밀한 설정과 디테일 간의 연계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큰 줄기는 흐름을 타고 이어져 영화의 끝까지 함께한다. 
 그래. 설국열차는 "그냥 언제나처럼의 보통 한국 영화." 정도다.